땜빵용 늦둥이, 팥
이번 팥 농사 얘기는 제가 사는 동네 형님들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멀리 가기도 어렵고 해서 가까운 데 사시는 분들을 찾아뵙고 말씀을 들은 것이지요. 한 분은 토종잡곡 마을로 지정된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사시는 이기준님입니다. 이기준님은 잡곡 농사도 하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생산한 콩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메주를 쑤고 된장을 담아 판매하는 역할을 하는 ‘당미’라는 업체의 대표님이기도 합니다. 또 한 분은 간동면 용호리 지풍개초록농장 송찬수님입니다. 이렇게 두 분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남쪽 지방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강원도에서 팥 심는 데는 원주 ‘안흥찐빵’ 만드는 동네 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팔려고 농사짓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왜냐구요? 소출량이 너무 적어서 전혀 돈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소출이 적은 작물은 어느 정도 값이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정상인데, 팥은 전혀 그렇질 않은 걸 보면 시장이 어디선가 왜곡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단보(300평)당 소출량이 100kg 조금 넘는 정도인데, 물건 값이 비싼 생협에서도 500g이 4,000원에 판매되고 있어요. 설령 생산자가 그 값을 다 받는다고 해도 평당 조수입이 3천원이 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실제로 생산자는 평당 2천원도 받기 어렵다는 계산이지요. 그래서 집에서 먹을 거나 심어먹는 정도이고, 팥을 위해 따로 밭을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모양이예요. 요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요즘 팥을 왜 심느냐? 세 가지 정도 이유가 있는 듯해요. 첫째는 제사가 있는 집은 꼭 팥이 있어야 하니까 심는 거고, 둘째는 옥수수나 콩을 심었는데 싹이 안 나왔다거나 새가 다 주워 먹었다거나 이랬을 때, 또는 다른 작물을 심을 계획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심게 되었을 때 땅을 놀릴 수 없으니까 응급 땜빵용으로 심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막 개간을 해서 땅에 거름기가 전혀 없는 경우, 또는 땅이 비탈지고 척박해서 다른 것 심어먹기가 어려운 경우에 팥을 심는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으니까 심는 거지 좋아서 심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거지요. 품은 많이 들고 값은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잡곡이, 보면 다 그래요. 앞서 얘기한 원주 ‘안흥찐빵’ 만드는 동네 같은 데는 말하자면 예외인데, 찐빵 소를 만들어야 하니까 동네에서 집단적으로 심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잡곡 농사가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생물 농사’는 무지하게 바빠요. 보관이 안 되니까. 예를 들면 참외나 배추나 상추 같은 작물은 매일매일 따서 내야 하거든요. 좋으나 싫으나 늘 매달려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야 돼요. 값이 아무리 낮아도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내야지 안 내면 다 망가지니까요. 그런데, 잡곡은 안 그렇찮아요. 저장이 되니까. 수확도 한꺼번에 하면 되고. 뒀다가 팔아도 되고. 병충해에도 비교적 강한 편이고. 어느 정도 안전성도 있고. 사실, 채소농사에 비하면 품도 그렇게 많이 안 들고. 얼마나 좋습니까?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돈이 안 된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품이 많이 든다는 건 소출에 비해 품이 많이 든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또 하나 잡곡농사는 무척 쉽고 편한 농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일반 채소는 거두는 걸로 일이 끝나는데, 잡곡 농사는 거두면서부터 일이 시작되는 거예요. 거둬서 말려서 떨어서 고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팥은 6월 중에 들어가서 서리 맞기 전에 거두면 되니까 작기가 짧은데, 웬만하면 감자나 마늘 후작으로 들어가도 되지만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 땅을 따로 차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늘에서도 그런대로 농사가 되니까 키 큰 옥수수밭에도 들어가고, 줄기 무성한 콩 밭에도 들어갑니다. 옥수수나 콩이 이미 싹이 나서 자라고 있을 때 들어가도 옥수수나 콩대를 의지해서 타고 올라가서 꼬투리를 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땜빵용으로 딱입니다.
콩이나 팥을 심을 때, 요즘은 새가 많아서 심으면 죄다 주워 먹는 통에 새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큰 숙제로 되어있습니다. 이기준님이 말씀 중에 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셔서 함께 말씀을 듣던 일동 모두가 귀가 솔깃했습니다.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 심을 때 같이 심어야 되는 거예요.”
“예?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예를 들어 새 열 마리가 먹는다고 치면, 나 혼자 심으면 열 마리가 다 달라 들어서 우리 밭만 주워 먹는데, 다른 사람 심을 때 같이 심으면 여기저기 분산되니까 두세 마리만 달라드는 거 아닙니까? 그거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제가 그걸 몰랐는데, 작년에 어쩌다가 콩을 조금 늦게 심으니까 산비둘기니 까치니, 이놈들이 새끼까지 죄다 데리고 와서 다 주워 먹은 거예요. 그래서 팥 심어먹고 말았지요.”
말씀 듣는 저로서는, 시골이라는 데가, 심지어 이런 것까지, 서로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 정말 진땀납니다.
보통 심는 품종은 붉은 팥이 있고, 가래팥 혹은 그루팥이라고 불리는 검정팥이 있는데 검정팥이 맛이 조금 나은 듯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올팥도 있고 늦팥도 있지만 봄, 가을이 없는 이 동네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되는 거고요.
이 동네에서 파종 시기는 5월 하순 정도를 적기로 보지만 6월 안으로만 심으면 되고요, 장마가 길면 소출이 줄고 해가 쨍하면 아무래도 많이 달린다고 합니다. 일찍 심으면 어차피 일찍 9월쯤에 거둬야 되는 것이고, 늦게 심으면 서리 내리기 전에 거둬야 합니다. 팥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서리를 맞아 놓으면, 삶았을 때 잘 익지 않고 설겅설겅해서 아무 쓸모가 없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수확은 팥이 아래서부터 위로 익어 올라가는데, 아래쪽 잎이 누릿누릿하면 뽑아야 합니다. 뽑아서 눕혀 놓으면 파랗던 것들도 다 여무니까 관계없습니다. 오늘 뽑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서리 와서 서리 맞으면 못 쓰는 거니까 좀 덜 여물었어도 서리 내린다고 하면 서둘러서 뽑아야 돼요. 좀 마른 다음에 서리 맞으면 괜찮아요.
어느 정도 마르면 단을 져서 묶어서 쌓아야 되는데, 안 묶으면 꼬투리가 벌어져서 알곡이 다 달아나 버리니까 어느 정도 말랐다 싶으면 일단 묶어서, 꼬투리가 벌어지더라도 그 안에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깥쪽에 있는 거는 떨구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자연이란 게 참 공평한 거야. 사람만 다 먹을 수는 없게 해 놨거든.”
이렇게 단 져 놓은 거, 집 마당으로 옮겨서 포장 깔고 도리깨로 두들겨서 떨으면 되는데, 조금 눅었다 하면 아예 떨리질 않으니까 바싹 말려야 합니다. 집에서 먹을 거라면 상관없지만 내다 팔 거는 떨자마자 얼른 골라야 합니다. 알곡이 작으니까 콩처럼 상 펴놓고 손으로 일일이 고르기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서둘러서 떨자마자 물에 담가서 조리로 일어서 고르는 거지요. 콩은 이렇게 하기가 어려운데 팥은 껍질이 단단하니까 물에 감가서 골라도 괜찮은 겁니다. 조리로 일어서 널어서 말리는 거지요. 그래야 때깔도 좋고, 불순물도 없어져서 제값을 받고 팔지, 안 그러면 예를 들어 만원 받을 거라면 오천 원밖에 못 받는 거예요.
살랑살랑 찬바람 일기 시작할 때, 뽑아서, 단 묶고, 날라다가, 떨어서, 볕 좋은 날 골라서, 물에 담가 일어서, 널어서, 말려가지고 거둬서 갈무리하는 과정이 눈에 선~한데요, 딱히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잔손이 무지 많이 가지요. 그저, 나 먹거나 나누어 먹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3~4대가 함께 사는 농가에서 나이 드신 솜씨 좋은 어르신들이 하루 온종일 굼지렁굼지렁--너무 느릿느릿하지도 않고 너무 세차지도 않으면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하는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 글쓴이가 새로 만든 말-- 하시기에 딱 좋은 일거리였던 거지요.
200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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